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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책 리뷰

걷는 사람, 하정우

by Becomingg 2020. 12. 6.

 

 

글 사진 하정우

문학동네

 

맘에 드는 구절

"내가 오늘 기분이 영 별로야. 웬만하면 다음에 얘기하자."

괜히 예민해지고 말과 행동에 날이 서는 때가 있다. 그런 날 내가 삐거덕거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못되게 구는 건 대개 그냥 '기분 탓'이다. 그런데 스스로 그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모든 게 '기분 탓'이라는 건, 사실 내 기분에 '당하는' 사람만 안다.

기분은 무척 힘이 세서 누구나 기분에 좌지우지되기 쉽다. 순간의 기분 때문에 그릇된 판단을 내릴 때가 있고,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단지 기분 때문에, 처리해야 할 많은 일들은 손도 대지 않은 채 맥없이 하루를 날리는 경우도 있다. 

 

기분을 전환하는 법은 저마다 다르다. 마음 편한 사람과 수다를 떨기도 하고, 평소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방법들은 확실히 즉각적인 효과가 있지만, 부작용이 따른다. 장기적으로 보면 건강에 해롭거나, 내 기분은 바꿔주지만 다른 이에게 민폐를 끼치며 상대의 기분을 구겨버리는 것이다. 이럴 때 나는 부작용 걱정 없는 걷기를 선택하는 편이다.

 

걷고 돌아오면 금방 곯아떨어진다. 불면증이나 한밤의 우울을 모르고, 어디서나 꿀잠 자는 나의 비결은 역시 걷기다.

 

만약 나쁜 기분에 사로잡혀서 지금 당장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라면 그저 나가서 슬슬 걸어보자. 골백번 생각하며 고민의 무게를 늘리고 나쁜 기분의 밀도를 높이는 대신에 그냥 나가서 삼십 분이라도 걷고 들어오는 거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기분 모드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하는 약속이다.

 

한때 나는 열정을 잃어버린 느낌을 받았다. 나 자신을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 갈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것, 내 보폭을 알고 무리하지 않는 것, 내 숨으로 걷는 것. 걷기에서 잊지 말아야할 것은 묘하게도 인생과 이토록 닮았다.

 

나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은 정말 치열하게 일한다. 그런데 휴일에 꼼짝도 못하고 나가떨어질 만큼 평소 일에 지나치게 매달리기 때문일까? 정작 일은 너무나 열심히 하는데 휴식 시간에는 아무런 계획도 노력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그대로 던져두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치고 피로한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곧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기'는 결과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 피로를 잠시 방에 풀어두었다가 그대로 짊어지고 나가는 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휴식을 취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휴식을 취하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적어도 일할 때처럼 공들여서, 내 몸과 마음을 돌봐야 하지 않을까?

 

고통보다 사람을 더 쉽게 무너뜨리는 건, 어쩌면 귀찮다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고통은 다 견뎌내면 의미가 있으리라는 한줌의 기대가 있지만, 귀찮다는 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하찮게 느껴진다는 거니까. 이 모든 게 헛짓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차오른다는 거니까.

 

각자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자신만의 길과 행보를 만들 수 있다. 내가 사는 곳 주변에 내 이름을 붙인 트레킹 코스를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누군가 말한 것처럼 '내가 가는 곳이 길이 된다.'

 

사람도 생명체인지라 날씨의 변화, 온도와 습도, 햇빛과 바람을 몸으로 맞는 일은 중요하다. 이를 통해 살아 있다는 실감을 얻고, 내 몸을 더 아끼게 된다. 봄과 가을의 햇빛이 다르고 여름과 겨울의 나무에서 각기 다른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이 지구에 발 딛고 사는 즐거움이다. 겨울은 혹독하게 춥지만, 그 추위를 피부로 느끼는 순간조차 내겐 소중하다.

 

개봉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보이는 오점은 시간을 되돌려 바로잡을 수가 없다. 내가 연기한 캐릭터는 영화 속에서 영원히 그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고된 촬영 현장의 요건들이나 그 시절 나의 개인적인 어려움은, 나의 얼굴로 영화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캐릭터와 그 영화를 볼 관객들 앞에 작은 핑곗거리도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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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개봉 후엔 무슨 수를 써도 다신 돌아갈 수 없는 촬영장에서 힘껏 내 몫을 해내는 것뿐임을.

 

느낀점

"인간 하정우가 생각하는 걷기의 의미와 걷기로 부터 나오는 인생 철학"

 

하정우라는 배우가 괜히 농도가 짙은 배우가 아니었다. 하정우의 매력을 잘 몰랐던 나도 하정우에 대해 생각할 때 연기파 배우, 하정우가 출연하는 영화면 재밌겠다고 무의식 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책을 읽어보니 역시나 연기를 대하는 진정성이란 힘이 그를 잘 모르는 나에게까지 화면을 뚫고 전해졌나보다. 

나는 유독 걷기, 산책을 좋아했다. 걸을 때 느껴지는 자연의 변화를 체감하고 주변 상권들의 변화들을 직접 관찰해보는 것이 좋았다. 걷는 사람인 하정우도 걷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할 때 그런 나와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읽는 내내 많이 공감됐고 위로가 됐다. 언젠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의 행동이 ADHD는 아닐지 생각하며 과거에 어른들이 예상가능한 아이가 아니였다는 말과 함께 본인의 어린시절이 힘들었을 것 같다며 견뎌서 대단하다는 위로도 괜시리 마음이 따뜻해졌다. 가만있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대신 '가만있지 못하는 능력'을 가져서 한번에 여러가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며 자신을 재정의내리는 점도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는 돈이라던지, 위플래시와 같은 광기어린 열정, 탐욕같은 것은 없다. 오로지 하정우라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남에게 휘둘리는게 아닌 매 순간순간 본인의 관찰로 느낀 것을 바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 해나가는 모습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본업인 연기에 대한 진심과 오랜시간 덤덤하게 수행해낸 끝에 얻은 통찰이 하정우를 꼰대로 만들지 않고 그가 하는 말이 귀담아 들리는 이유일 것이다. 이 사람의 인생은 더 깊어질 것 같다. 깊은 사람이 되고 싶던 나에게 이 책을 읽었던 시간들은 참 소중했다. 두고두고 고독하거나 외로울 때 오디오북으로 녹음해 들으면서 그와 함께 걷는 것처럼 걸으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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